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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지카요시 (16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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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지카요시는 1632년에 태어나 1717년에 사망한 인물로, 이즈모 마쓰에번의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차남이다. 숙부의 데릴사위가 되었으나 친아들이 태어나면서 형으로부터 3만 석을 받아 히로세번을 입번했다. 에치고 소동 조정 과정에서 쇼군의 노여움을 사 영지가 삭감되기도 했지만, 이후 복귀하여 문무를 겸비한 명군으로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1702년 장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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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지카요시 (1632년)
기본 정보
씨족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운슈 가문→아카시 가문→히로세 가문)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간에이 9년 9월 28일(1632년11월 10일)
사망교호 2년 9월 19일(1717년10월 23일)
묘소쇼운지
관위종5위하, 고즈케노스케
막부에도 막부
히로세 번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나오마사
어머니: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딸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형제자매쓰나타카
지카요시
다카마사
나오오카
고마히메 (마쓰다이라 나오카타 정실)
쓰루히메 (사타케 요시타카 정실)
다케히메
만히메
가메히메
기야히메
마쓰히메 (오쿠보 다이젠 실)
배우자미쓰히메 (정실)
자녀시게히메
도미히메
지카토키
만히메
기타 정보
계명호운인
주군도쿠가와 이에쓰나 → 쓰나요시
마쓰다이라 지카요시 초상
마쓰다이라 지카요시 초상(쇼운지 레이센인 소장)

2. 생애

간에이 9년(1632년), 이즈모 마쓰에번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숙부인 오노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요시의 데릴사위가 되어 상속자로 여겨졌으나, 숙부에게 친아들 나오아키가 태어나면서 상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간분 6년(1666년), 형 쓰나타카로부터 3만 석을 받아 히로세번을 세우고 초대 번주가 되었다.

친족이 다스리던 에치고 다카다번에서 에치고 소동이라 불리는 가신단 내부 분쟁이 발생하자, 히메지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노리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노여움을 사 영지가 절반으로 삭감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나중에 다시 3만 석으로 회복되었다.

번주로서는 문무 양도를 중시하고 영지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간분 9년(1669년), 에도(현재의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에 있는 祥雲寺의 塔頭|톳추일본어(큰 절에 속한 작은 절)인 瑞泉山 霊泉院|즈이센산 레이센인일본어을 건립하기도 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장남 지카토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교호 2년(1717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간에이 9년(1632년), 이즈모 마쓰에번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메이레키 원년(1655년) 11월 7일, 숙부인 오노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요시의 데릴사위가 되어 상속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나오요시에게 친아들 나오아키가 태어나면서, 간분 6년(1666년) 형인 마쓰다이라 쓰나타카로부터 3만 석을 분여받아 히로세번을 입번하였다. 처음에는 창미에 의한 지급이었다고 한다.

2. 2. 에치고 소동 조정과 영지 삭감

친족인 에치고 다카다번의 가신단에서 에치고 소동이 일어나자, 지카요시는 히메지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노리와 함께 소동의 조정역을 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노여움을 사 폐문 처분을 받았다. 더불어 영지도 기존 3만 석에서 1만 5000석으로 삭감당했다. 이후 영지는 다시 3만 석으로 회복되었다.

2. 3. 번정과 사망

메이레키 원년(1655년) 11월 7일, 숙부인 오노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요시의 데릴사위가 되어 상속자로 여겨졌지만, 나오요시에게 친아들 나오아키가 태어났기 때문에 상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간분 6년(1666년), 형인 쓰나타카로부터 3만 석을 분여받아 히로세번을 세우고 초대 번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창미(蔵米|쿠라마이일본어, 봉급을 쌀로 지급하는 방식) 형태로 영지를 지급받았다고 한다.

친족이 다스리던 에치고 다카다번에서 가신단의 내부 분쟁인 에치고 소동이 발생하자, 지카요시는 히메지번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노리와 함께 이 소동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노여움을 사 폐문(閉門|헤이몬일본어, 자택 근신) 처분을 받았고, 영지도 1만 5천 석으로 삭감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이후 영지는 다시 3만 석으로 회복되었다.

번 통치에 있어서는 문무 양도를 중시한 명군으로 평가받으며, 영지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간분 9년(1669년), 에도(현재의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에 있는 祥雲寺의 塔頭|톳추일본어(큰 절에 속한 작은 절)인 瑞泉山 霊泉院|즈이센산 레이센인일본어을 건립하기도 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3월 23일, 가독을 장남 지카토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교호 2년(1717년) 9월 19일에 86세라는 긴 생을 마치고 사망했다.

3. 가계

(내용 없음)

3. 1. 처와 자녀


  • 정실: 만희 - 마쓰다이라 나오라의 딸
  • * 장녀: 시게히메 - 타무라 타케아키의 정실
  • * 차녀: 토미히메 - 토다 미쓰마사의 계실
  • * 장남: 치카토키
  • 양녀
  • * 여자: 만히메 - 타무라 타케아키의 딸, 이타쿠라 시게타카의 정실

참조

[1] 문서 고모로번
[2] 문서 오가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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